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제스/타 정치인과의 관계 (문단 편집) == [[김구]] == || [[파일:external/blogimg.ohmynews.com/1053975230.jpg]] || || 장제스와 김구 || 상당히 좋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승만이 미국에게 선택받은 독립운동가였다면 장제스가 손잡은 독립운동가는 김구였다고 할 수 있다. [[윤봉길#s-3|훙커우 의거]] 이후 장제스는 김구의 최대 후원자였고 장제스는 김구가 죽은 이후에도 김구를 항일 동지라고 높였으며 [[김신]]을 집안 사람처럼 대우하는 등 김구와 자신의 인연에 대해 수차례 강조했다. 그러나 장제스는 임시정부가 광복군을 조직하자 1941년 행동 준승을 만들어 국민당군의 통제하에 두려 하였는데 그 이유가 광복군이 일종의 군벌화되는 것을 경계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풀린 것은 1944년이다. 그러나 이건 장제스 입장까지 고려하면 일방적으로 비판하기도 애매한 게, 원래 국가지도자 입장에서 난민이란 존재 자체가 상당한 리스크고, 특히 일제 같이 팽창주의적 야욕이 강한 이웃을 자극할 수밖에 없는 그 시대 조선인 독립운동가들이라면 더욱 그렇다. 게다가 안그래도 자국 내에선 실질적으론 본인 통제가 안되는 무장집단이 많아서 골칫거리인 장제스 입장에선 항일이란 정치적 입장은 고려해도 또다른, 그것도 외국인 무장집단의 국내활동을 용인하는 거 자체가 상당한 위험요소였다. 개인적인 감정도 상당히 호감이 깊어서, 김구의 아들인 [[김신]]이 1963년 한국에 흉년이 들었을 때 타이완에 쌀 5만 톤을 구하러 갔을 때 처음에는 대만 정부관리들에 의해 거절당했지만 김구를 각별하게 생각한 장제스의 특별 지시에 의해 한방에 성사되었다는 에피소드도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